문학작품들
을묘왜변의 기록은 도순찰사였던 이준경과 영암을 지키기 위해 내려온 전주부윤 이윤경, 근처에 귀양을 왔다가 왜구를 피해 돌아다닌 노수신, 삼당 시인이자 임구령의 둘째 사위였던 고죽 최경창과 백광홍, 좌도방어사 남치근과 우도방어사 김경석의 부장이었던 양사준 등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글 속에 양달사 의병장에 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이윤경의 문집에 기마술에 뛰어난 인물로 이름만 언급되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여기에서 당시 살았던 분들의 글을 언급하는 이유는, 당시 을묘왜변이 얼마나 끔찍했는가를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1. 남정가(南征歌)
양사준은 조선의 4대 명필 중 한 명인 양사언의 아우로서, 을묘왜변 당시 좌도방어사였던 김경석의 종사관으로 영암에 내려온다.
남정가는 왜구를 토벌한 뒤 전승의 기쁨을 노래한 우리나라 최초의 전쟁가사다. 총 58행에 걸쳐 을묘왜변의 참상과 왜적을 물리친 과정‚ 그리고 승전의 기쁨 등을 노래한 작품으로, 영암성 전투 당시 양사준은 영암성에 있었다. 하지만 자신이 모시는 김경석이 비난을 받고 있었음에도 승전가를 읊었다는 점이 다소 의아스럽다.
2. 정왜대첩(征倭大捷)
양사준
을묘년 왜변을 물리친 공적을 찬양하는 시이나, 누구의 공인지를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다. 이준경이나 이윤경, 김경석을 말한다고 하나, 양달사를 의미한지도 모른다. 영암성 전투에서 입은 병마로 인해 평생 시달렸지만, 김경석의 종사관이다 보니 아무런 포상을 받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將軍一捷萬人觀(장군의 승전을 만인이 보았고)
壯士從遊迄可還(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雨洗戰塵淸海岱(비바람에 전흔이 씻겨 산해가 티없이 맑고)
笛橫明月捻關山(구슬픈 피리소리와 밝은 달빛이 월출산 자락에 여울진다)
空憐婉畫餘心上(속절없는 연민과 달콤한 말은 마음에 두었거늘)
不數浮名動世間(수많은 헛된 명성 세상을 떠도는구나)
高閣夜凉仍獨坐(서늘한 밤에 높은 망루에 홀로 앉아 있으니)
荷花偏似夢中顔(연꽃이 꿈인 듯 얼굴을 내민다)
3. 영암위해(靈巖圍解)
노수신
소재(穌齋) 노수신 문집의 권4에 실린 것으로, 노수신이 진도에 유배되어 생활하던 중 을묘왜변 이틀 후인 5월 13일부터 7월 19일까지 왜구를 피해 다니며 적은 이른바 피구록(避寇錄)에 적힌 시다. 소재는 왜구가 물러간 이후인 7월 8일에 영암에 왔다가 최경창과 도갑사 주지 등을 만나고 12일에 강진 성전으로 떠났다. 노수신은 당시 이준경의 스승 겸 사촌형인 이연경의 사위로 훗날 영의정까지 올랐다. 따라서 그는 왜구를 피해 다니면서도 당시 실세인 이준경, 이윤경 덕분에 대접을 받으며 다녔다. 그가 5월 27일 함평에서 영암성의 승리를 듣고 지은 시를 보자.
靈巖圍解 二十七日, 晴. 人皆曰 全州府尹李潤慶之力也
(영암이 해방되다. 이십칠일, 맑음,
사람들이 모두 전주부윤 이윤경의 힘이라고 한다.)
牟陽遇偵卒 모양(함평)에서 척후병을 만났더니
云自浪山歸 영암에서 오는 길이라고 하네
倭賊百餘級 왜적을 백여명이나 살해했고
解城三匝圍 수겹으로 포위된 성이 해방되었다고 하네
皆由有李尹 모두 이윤경 부윤이 있었기에
竝著是恩威 임금의 은총과 위엄을 함께 드러냈네
可謂粗安幸 다행이라고 해도 될지 모르겠지만
應知大捷非 당연히들 알겠지, 대첩이 아니었더라면.
4. 달량행(達梁行)
백광홍
1555년(명종 10) 을묘왜변(乙卯倭變) 때 백광훈이 진도에 유배된 노수신에게 배움을 청하기 위해 찾아갔다가 달량포에서 체험한 을묘왜변 참상을 훗날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1603년 간행된 옥봉시집 하권에 수록된 시로, 옥봉은 호남절의록에 양달사와 함께 기록된 장흥의 백세례(百世禮) 재종 동생이면서도, 영암성에서 활약한 양달사를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達梁城頭日欲暮(달량성에 해가 저무려고 하는데)
達梁城外潮聲咽(성밖의 바닷물 소리 흐느끼고)
平沙浩浩不見人(광막한 모래사장에 사람의 그림자도 없네)
古道唯逢纏草骨(옛길에는 잡초에 엉킨 해골이 뒹굴고)
身經亂離心久死(난리를 겪은 아픔으로 마음은 이미 죽은 지 오래)
慘目如今那更說(그 참혹함을 다시 말하자니 지금 일만 같네)
當年獠虜敢不恭(그해 왜구들은 정말 흉악스러웠지)
絶徼孤城勢一髮(외딴 성은 위기 일발이었고)
將軍計下自作圍(장군의 계략은 스스로를 함정에 빠뜨렸네)
士卒不戰魂已奪(병사들은 싸워보지도 못하고 목숨을 잃었지)
達嶼峯前陣如雲(달서봉 앞에 구름같은 진은 치니)
洪海原頭救來絶(드넓은 바다에 목숨 구할 길도 끊기고)
天長地闊兩茫茫(하늘은 멀고 땅은 넓어 막막하기만 하여)
解甲投衣生死決(갑옷을 풀고 옷을 벗어 생사 결단을 내렸지만)
哀汝誰非父母身(애닯구나 누군들 부모 몸 아닐까)
無辜同爲白刃血(죄없이 모두가 번뜩이는 칼날에 피를 흘리니)
烏鳶銜飛狐狸偸(까막솔개 살점을 물어 나르니 이리는 훔쳐 먹고)
家室來收頭足別(가족이 와 수습하니 머리와 발 따로구나)
山川索莫草樹悲(산천이 삭막하고 초목도 비통해 하니)
境落蕭條灰燼滅(잿더미가 된 적막한 마을에 불씨가 가물거리네)
遂令兇醜入無人(흉악한 왜구두목이 침입하니 인적이 사라지고)
列鎭相望竟瓦裂(성마다 깨진 기왓장만 보인다)
羯鼓朝驚鎭南雲(진군하는 북소리에 남녘 구름이 놀라고)
腥塵夜暗茅山月(피비린내 나는 밤, 모산에 뜬 달이 어둡다)
妻孥相失老弱顚(처자식을 잃은 노인 병들어 쓰러지고)
草伏林投信虎穴(풀숲에 숨고 호랑이 굴 앞에 의지할 지경이니)
迂儒攬古泣書史(어리석은 선비가 옛날을 그리며 눈물진 역사를 쓴다)
不意身親見此日(내가 이런 날을 볼 것이라는 것은 생각을 못했는데)
流離唯日望官軍(기약없이 관군이 오기만을 기다렸지)
彼葛旄丘何誕節(저 칡덩굴은 어찌 저리 마디가 엉성한가)
聞說長安遣帥初(듣자니 장안에서 장수를 처음 보내며)
玉旒親推餞雙闕(임금이 친히 궁궐에서 전별했다 하네)
天語哀痛皆耳聞(애통해 하시는 말씀 모두 들었거늘)
臣子何心軀命恤(신하라면 어찌 마음으로 구휼하지 않았을까)
錦城千羣竟無爲(나주의 수많은 군사가 무위가 되었네)
朗州一戰難補失(영암의 일전으로는 잃은 것을 채우기 어려우리)
月出山高九湖深(월출산은 높고 구호가 깊다지만)
水渴山摧恥能雪(강물이 마르고 월출산이 꺾여도 치욕을 반드시 설욕하리)
至今海天風雨時(바야흐로 바다는 풍우가 내릴 시기)
鬼哭猶疑初戰伐(첫교전의 소리가 귀곡성처럼 느껴지네)
爲吟此辭酹煩冤(이렇게 푸념하며 괴롭게 술을 마시니)
征南舊將面應熱(왜구와 싸운 옛장수들의 생각에 술기가 오른다.)
將軍一捷萬人觀(장군의 승전을 만인이 보았고)
壯士從遊迄可還(병사들은 집으로 돌아갔다)
雨洗戰塵淸海岱(비바람에 전흔이 씻겨 산해가 티없이 맑고)
笛橫明月捻關山(구슬픈 피리소리와 밝은 달빛이 월출산 자락에 여울진다)
空憐婉畫餘心上(속절없는 연민과 달콤한 말은 마음에 두었거늘)
不數浮名動世間(수많은 헛된 명성 세상을 떠도는구나)
高閣夜凉仍獨坐(서늘한 밤에 높은 망루에 홀로 앉아 있으니)
荷花偏似夢中顔(연꽃이 꿈인 듯 얼굴을 내민다)
5. 을묘란후(乙卯亂後<小時作>)
최경창
최경창의 임구령의 둘째사위로서 구림에 정착한 인물이다. 앞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1555년(명종 10) 최경창이 17세일 때, 친구 백광훈·이달과 함께 있을 때 왜구(倭寇)가 갑자기 들이닥쳤다. 배를 타고 피하려고 하였으나, 왜구의 배가 갑자기 몰려와서 포위당하였다. 그때 달빛이 대낮처럼 밝고 파도가 일지 않았으므로 최경창은 품속에서 옥퉁소를 꺼내서 처량하게 한 곡조를 불었는데, 소리가 매우 맑고 구슬펐다. 왜구의 무리가 그 아름다운 피리소리에 반하여 모두 고향 생각이 나서 서로 돌아보며 말하기를, “여기 포위된 사람 가운데 반드시 신인(神人)이 있다.”하고, 슬그머니 한쪽의 포위망을 풀어주어 최경창 일행이 탈출할 수 있었다. 하지만 해주최씨 문중에서 전해져 내려오는 이 설은 잘못된 것 같다. 당시 최경창의 활쏘기 실력이 조선 최고였으므로, 아마도 최경창의 활솜씨에 놀라 도망갔을 가능성이 크다.
을묘왜변과 관련한 최경창의 시는 을묘난후(乙卯亂後)로, 장수들의 계책이 부족해 성이 함락당하고 나라가 위기에 처한 것을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담겨 있다.
乙卯亂後<小時作>(을묘난 후, 소시작임)
漢將孤神算(한나라 장수가 신비로운 계책이 적어)
邊城戰骨荒(변방의 성에는 전사자의 유골이 널려 있네)
羽書飛不息(비보가 그치지 않고 날아)
日夕到昭陽(밤낮으로 소양에 도착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