읍성 발굴 전
읍성 발굴 전

 영암군 역사상 가장 위대한 보물이자, 전라도 서남해안의 보루였던 영암성이

일제 강점기 이후 마구 훼철되어

이렇게 초라하게 일부 잔해만 남아 있었습니다.

이제 영암성 복원 운동에 다함께 나서야 할 때입니다.

 영암성의 위용을 되찾아 영암의 랜드마크로 만듭시다!

 

사라진 영암군 보물 1호, “영암성”

1. 축조

◯ 우리 영암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선사시대부터다. 그리고 영암 소재지에 사람들이 집단을 이루면서 살게 된 것은 외적의 침입시 월출산에 피신하여 투석전으로 물리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시대가 흘러 점차 인구가 많아지고, 적의 침입이 잦아지면서 군민들은 산중턱에 산성을 쌓고 효율적으로 대처하면서 인구가 더욱 늘어났다. 하지만 영암산성의 단점은 피난길이 가파르고 물이 없다는 점이었다. 고심 끝에 군민들은 고려말부터 평지에 읍성을 쌓기 시작했다. 읍성이란 군관민(軍官民)이 함께 기거하는 성을 말한다.

 

◯ 세종 원년(1419년) 7월 28일 삼도도통사 유정현이 “바닷가 백성의 수효가 많아지고 전야(田野)도 개간되었는데, 왜적의 약탈(掠奪)과 살상(殺傷)의 화가 몹시 두려우니(중략) 둔성(屯城)을 쌓아”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으나 시행되지 못했다. 막 즉위한 세종이 미처 국토 변방까지 신경쓸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 그러다 1429년 2월 병조판서 최윤덕이 “하삼도(下三道) 각 고을의 성 중에서 그 방어가 가장 긴요한 연변(沿邊)의 고을들은 산성(山城)을 없애고 모두 읍성(邑城)을 쌓을 것이며 (중략) 각 고을에 견실하지 못한 성이 있으면 각기 호수의 다소를 참착하여 적당하게 개축하”자는 제안에 세종이 승낙을 하여 국토 변방마다 읍성을 쌓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 영암과 같은 경우에는 기존 성을 활용하여 쌓도록 지시되었고, 1451년(문종1년) 8월 21일 도체찰사 정분이 영암읍성 축성이  마감되었다고 보고를 했다. 약 22년 소요된 것인데, 당시에는 해자가 없었다.

 

2. 규모

◯ 문종때 : 둘레4,369척(1.3km). 평지높이 12척, 고험처 9척, 여장높이 3척5, 여장길이 639척, 적대 6곳. 문 3곳, 옹성과 해자 없음. 

◯ 여지도서 : 4,369척, 우물4, 연못 2, 성내건축물 5동, 연못 2

◯ 1872년 지도 : 성내 건축물 15동으로 증가

◯ 2009년 8월 시굴조사시 : 둘레 2.01km. 해자 흔적 발견. 1451년 준공 보고 이후 영암군수는 해자를 만들기 위해 금교언(金橋堰, 군더리제방. 여기에서 금교는 새로운 다리라는 뜻)을 축조하였고, 금교언 축조로 해자에 물을 댈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 1908(증보문헌비고)년 현재,  전국 읍성은 146개(이 중 전라도가 30개였고, 영암성은 규모면에서는 나주성보다 작으나 완성도 면에서는 가장 튼튼한 성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3. 훼철

◯ 군사적 용도가 사라진데다가, 1876년 2월 조일수호조규(朝日修好條規) 후 무관세무역과 일본화폐통용 등을 통해 일본인들이 몰려와 상권을 지배하면서 도로망과 읍내외 차단벽 훼철을 요구하였고, 남대문은 이미 훼철된 상태였다.

 

◯ 1907년 7월 30일 이토히로부미 통감은 훼철 반대를 주장하는 국왕과 조선인들의 반대를 합법화하기 위해 내각령 제1호로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 당시 이완용을 중심으로 한 위원들의 찬성으로 동대문과 대구 등의 성벽 훼철이 시작되면서 성벽 훼철이 당연시었고, 전국에서 성벽 훼철이 전개되었다. 1년 만에 위원회는 폐지되었으나, 이후 모든 성곽의 훼철되고 만 것이다.

특히, 토지조사령 후 조선으로 들어온 자국 사람들에게 성곽 등의 필지를 동양척식회사를 통해 헐값에 분양하였고, 영암읍 성곽이며 성안의 모든 시설들의 훼철이 가속화되었을 뿐만 아니라, 성곽이 있었던 읍소재지들은 대부분 일본인들의 손아귀에 들어갔다.

 

◯ 일제 때 동문을 비롯한 3개문과 동문에서 영암군청 사이의 성벽이 모두 훼철되긴 했으나 그런대로 많이 남아 있던 영암읍성은 해방 이후 중장비 등을 동원하여 토지 소유자들이 대대적으로 철거하기 시작, 새마을운동 때 거의 사라지고 말았다. 특히, 2000년 이후 동무지구개발사업으로 그나마 남아 있던 경찰서 뒷편의 성곽이 크게 훼철되어, 일부 여중생들은 영암의 쌍무덤으로 착각할 정도로 크게 훼손되었다.


◯ 2018년 영암군의 '달마지공원 개발 타당성 조사 용역' 을 통해 영암성대첩 기념광장을 조성키로 하면서 군민들의 관심이 높아졌고, 2021년 전남문화재연구원의 '영암읍성 보존 및 활용방안 연구 용역' 이후 영암성 복원에 대한 주민들의 요구가 거세어짐에 따라, 민선 9기 영암군수는 영암성 복원을 선거 공약으로 내세웠고, 현재 구체적인 개발 계획이 수립 중에 있다. 


 

<참고자료>   

 1872년(고종 8년) 영암군지도 중 성곽 그림. 

1871년(고종 8) 列邑地圖 謄上令(열읍지도 등상령)에 따라 1872年에 전라도에서 일괄적으로 화공에게 시켜서 만들어 올린 영암군 군사용 채색지도로, 성곽이 알아보기 쉽도록 네모로 그려져 있고, 동문과 서문, 남문을 통과하는 도로는 대로로서 진하게 표기돼 있다. 또한 양달사 의병장이 제2차 전투에서 물이 없는 군더리 방죽(현 공설운동장)으로 유인하였다고 하는 금문언(金橋堰)이 보인다. 바로 동문 앞에 파놓은 해자에 물을 공급하던 저수지이자, 영보역으로 말을 타고 오가던 관리들이 물을 먹이던 곳이다.                                                                     

                                                                


                                                                                1872년 지도상에 그린 1555년 5월 24일(양력 6월 13일) 왜구 침입 경로와 전황도임(이영현 그림)

 


1918년 지적도상의 성곽 형태(육지측량부에서 1914년부터 5년에 걸쳐 만든 지도, 작성 이영현)



1919년경 영암성

(이 지도는 1911년 개교한 영암심상소학교(일본인들만 다니던 학교) 졸업생 중 한 사람인 요시다케 다케오(吉竹武男)가 그린  1919년 당시의 성곽 모습으로, 당시만 해도 영암읍성의 3대문은 사라졌으나 아직은 군청이 영암성당 쪽에 있었고 구 형방청  건물(현 한전 건물)에 다카다 13사단의 1개 중대가 영암을 지키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추억의 영암<영암군립하정웅미술관, 2017년)에서 발췌 




2009.8월 전라남도문화재연구원 시굴조사 보고서를 참고로 한 성곽 윤곽(작성 이영현)



4.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 추진 방안(2022년 6월 10일, 제2회 의병장 양달사 학술세미나 발표 자료임, 발표자 이영현(양달사현창사업회 사무국장, 소설가). 본 자료의 저작권은 필자에게 있으며, 무단 전제를 금함.)


Ⅰ. 필요성

 

지난 2019년 7월 27일 영암에서 장만채 회장을 비롯한 27명의 경향 각지의 영암 출신 인사들이 모여 발기인 모임을 가졌다. 1555년 을묘왜변의 호국 영웅 양달사 의병장을 기념하기 위한 양달사 현창사업의 첫 출정식이었다. 그날 치러진 모임에서 우리는 1971년부터 1974년까지 군에서 역동적으로 추진하다가 중단된 양달사 현창사업을 재추진하기로 뜻을 같이하고 양달사현창사업회 창립대회 준비와 회원 모집에 적극 나서기로 했다.

그리고 2019년 9월 25일, 양달사 현창사업회 창립총회를 대대적으로 개최하면서 영암이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의 고장임을 대내외에 선언하기에 이르렀다. 장독샘과 시묘공원 정비에 박차를 가하면서 홈페이지 개설과 영암성 대첩을 다룬 소설 「바람벽에 쓴 시」 발간, 그리고 3회에 걸친 회보 발간 등을 통해 양달사 의병장의 존재를 널리 알리는 한편, 1555년 5월 25일 양달사 의병장을 중심으로 영암군민이 단합하여 6천여 왜구를 물리친 영암성 대첩이야말로 영암군 역사상 가장 자랑스러운 업적이라는 데 군민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도 했다.

하지만, 1970년대에 군에서 추진해 왔던 사업들의 복원에는 어느 정도 성공했으나, 영암성 복원이나 양달사 영정 제작, 동상 건립 등의 사업은 번번이 벽에 부딪혔다. 장기적인 시간과 막대한 예산이 소요되는 사업이다 보니 행정에서 난색을 표했다.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을 군정의 주요 업무로 추진해 달라고 수차 건의를 했지만, 현재까지 아무런 반응이 없다.

따라서 본인은 그 동안 지면상으로나, 주민들과의 대화를 통해 이 사업을 군에서 직접 추진하기를 제안하면서, 오늘 논문을 시작하려고 한다.

참고로, 조선의 4대 명필 중 한 사람인 양사언의 시집인 봉래집(蓬萊集, 1571)의 부록에는 그의 동생 양사준의 시문이 남겨져 있는데, 그 중에는 1555년 5월 25일 을묘왜변 때 우도방어사 김경석의 종사관으로 참전하였다가 영암에서의 승리를 노래한 “정왜대첩”이라는 시가 남아 있다. 을묘왜변 때 왜구를 물리친 큰 승리라는 뜻으로, 필자는 임진왜란 때 진주성 대첩이나 행주성 대첩을 참고하여 정왜대첩을 영암성대첩이라 부르고 있다.

 

 

Ⅱ. 주요 사업

 

1. 영암성 복원 사업

필자가 그 동안 나주읍성과 병영성, 진도 금갑진성, 달량진성 등을 가 보았지만, 성터 흔적이 우리 영암성보다 적었던 곳들이 대부분이다. 따라서 조선 말까지 서남부의 군사적 요충지였던 영암성을 문화재로 지정하고, 보존 작업을 제대로 추진해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해야 한다.

이 사업을 제대로 추진하려면 영암군에서 핵심사업을 추진하고, 양달사 현창사업회 등이 일부 소규모 사업을 분담해서 추진하는 방식이 가장 효율적이라고 생각한다.


주 관사업명세부 사업
영암군영암성대첩
기념사업

① 영암성 복원 사업(시굴조사, 문화재지정, 남문 건립, 성벽 복원, 영암성대첩길 조성)

② 영암성대첩 기념 조례 제정

③ 영암성대첩 대제전 개최(체육대회, 공연, 문화행사 등)

④ 영암성대첩 관광자원화 사업

양달사
현창사업

① 영정제작 및 동상건립

② 시묘공원 정비사업(여막 설치 및 조경사업 추진)

③ 사당 건립 등

양달사
현창
사업회
영암성대첩
기념사업

① 양달사 및 영암성 관련 학술대회 개최

② 영암성대첩 관련 각종 홍보

양달사
현창사업

① 양달사 추모제

② 영암성대첩 기념식 개최

③ 시묘공원 조성 등 소규모 사업 추진


<주요사업 추진 주체 및 세부 목록>

 

① 종합적인 발굴조사.

지금까지 영암읍성에 대한 전체적인 발굴조사는 한번도 이루어진 적이 없다. 단지 열무정 주변과 경찰서 뒤편 성곽에 대하여 2011년 영암군 소도읍 육성사업 및 달맞이공원 조성사업과 관련하여 조사한 게 전부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암읍성에 대한 자료도 ‘영암군 소도읍 육성사업 관련 시굴조사 영암읍성(2011)’과 ‘영암군 달맞이 공원 조성 사업’과 관련한 전남문화재연구원의 ‘영암읍성 보존 및 활용방안 연구용역 보고서(2021)’가 전부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전체적인 길이는 2.01km. 더욱이 1915년 지적도를 만들 당시 성벽을 기준으로 삼아 서남리, 역리, 동무리 등을 구분했기 때문에, 필자가 현재의 위성지도 위에 그린 그림과 일제의 지적도를 겹쳐 보면 당시의 성곽의 윤곽을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다. 현재 민가가 들어서 있는 곳은 제외하고, 가능한 곳만이라도 발굴해서 영암성 보존 및 활용 방안을 강구해야 한다.

(상은 무등아파트 뒤편, 하좌우는 영암도서관뒤, 하중앙 영암성당 입구의 장초석)


② 영암성 발굴 보존 및 문화재 지정

최우선 과제는 문화재 지정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우선 영암군에서 영암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해야 한다. 1907년 7월 30일, 남대문을 헐어버린 데 따른 조선인들의 반감을 잠재우고자 제1호 내각령으로 성곽을 법적으로 훼철할 수 있는 ‘성벽처리위원회’를 설치한 이등박문은 이완용 등의 위원들 찬성으로 전국의 성곽을 허물기 시작했다. 하지만 일제 강점기 지도를 보면 지적도에서 볼 수 있듯이 해방 전까지만 해도 성곽이 꽤 많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7, 80년대 영암정수장 설치시부터 새마을사업, 동무지구 개발사업 등 군 주도로 영암성을 많이 훼철하였고, 최근까지도 아파트 등을 지으면서 몰지각한 업자들이 성돌을 야밤에 실어다가 외지로 빼돌리고 있다.

‘2021년 영암읍성 발굴 및 활용방안 용역 보고’시 촬영한 자료


지난 2018년 광주전남연구원 김만호 연구위원은 영암읍성을 도시재생사업과 연계하여“종합적인 발굴조사를 바탕으로 문화재로 지정하는 방안을 모색”해야 한다고 제안했지만, 영암군은 여전히 반응이 없다. 서둘러 영암군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하고, 예산 부담이 적은 공공용지 필지부터 발굴하여 전라남도 문화재로 관리하여야 한다.


③ 주요 시설물 및 전적지 표지판 설치

현재 영암읍성을 방문하는 사람들은 성터 앞에 서 있는 푯말을 보고 크게 실망한다. 1555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에 대한 설명이 단 한 줄도 없을뿐더러 표기도 잘못돼 있다. 일제가 객사터에 세운 영암군청에 대해 아는 군민도 거의 없고, 500년 동안 저 멀리 추자도까지 호령했던 영암 동헌의 위치마저 찾아볼 수가 없다.

역사를 잊는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다고 했다. 조선시대 그 많던 건물들이 왜 허물어졌고, 일제가 어떻게 활용했는지 등에 대한 교육이 반드시 이루어져야 한다. 그래야만 영암읍성을 제대로 복원할 수가 있다.

 

<영암성 안팎의 주요 시설 위치>

성 주변 시설현재 위치

동문(東門)

영암읍 동무리 109, 농협군지부 앞 도로에서 동성건재 사이

서문(西門)

영암읍 서남리 현 전화국 남사면 골목길 앞

남문(南門)

영암읍 남풍리 127 주변

동헌(東軒)

영암읍 서남리 72, 75, 76. 현 영암읍교회, 영암성당

객사(客舍)

영암읍 동무리 158, 159, 현 영암군청

내아(內衙)

영암읍 서남리 72 부근(동헌 뒤편)

관청(官廳)

영암읍 서남리 78

작청(作廳)

영암읍 서남리 70, 현 영암등기소

장청(將廳)

영암읍 서남리 등기소 부근

향청(鄕廳)

영암읍 서남리 51

형방청(刑房廳)

영암읍 서남리 75, 현 한전

사창(司倉)

서문안 동쪽, 전화국 테니스장 쪽

진창(賑倉)

영암읍 동무리 159

군사(郡司)

영암읍 서남리 67-3. 영암군 호장(戶長)이 집무하던 터

훈련청(訓練廳)

영암읍 동무리 164

대월루(對月樓)

군청 앞 광장. 동무리 139번지

연지(蓮池)

영암읍 동무리 143, 군청 앞 광장에서 농협군지부까지

장독샘

영암읍 동무리 137-7, 현 오거리. 유일하게 표지판이 있다.

옥(獄)

영암읍 서남리 132-138, 현 영암경찰서

향교 터

흔히 괴성개(舊鄕校)라 부름. 구 읍농협에서 제일교회까지

금교(金橋)

군더리는 ‘금다리’의 방언. 현 영암 오일장 동쪽 어귀

역고개(驛峴)

역몰 서쪽에서 망호리로 넘어가는 고개. 백련잔등

영보역(永保驛)

현 에이마트 주변, 영보에서 옮겨 와서도 영보역으로 불림

사직사(社稷祠)

영암읍 회문리 17에 있던 사직사 터

관서재(官書齋)

영암읍 남풍리 남풍리 190, 191. 아전들의 자제 교육 기관


이밖에도 1555년 5월 25일 영암성 대첩시 전적지 표지판이 필요하다. 당시 기록들을 보면, 동문 앞의 향교에 왜구가 주둔하였고, 뒷산에 매복해 있던 양달사 의병장이 5월 25일 아침에 창우대로 하여금 왜구가 주둔하던 향교 앞에서 굿판을 벌이게 하였다는 기록들이 있다. 현 영빈관 식당과 구 영암읍농협, 제일교회 주변 10여 기의 민가들이 구 향교 터이자, 영암성 대첩의 승전지다.

영암여고에서 덕진다리까지의 군더리 방죽도 중요한 전적지다. 영암성 대첩이 벌어졌던 음력 5월 25일은 양력으로 6월 14일이다. 논에 물을 대느라 군더리 방죽의 물을 바닥까지 빼냈고, 양달사 의병장은 잡초에 뒤덮인 그 방죽 위로 왜구를 유인했다. 패한 척 달려가다가 뒤따라든 왜구가 진흙 구덩이에 빠지자, 다시 말을 돌려 왜구를 참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다시 말해서 향교 앞에서는 양달사 의병장과 군민들이 어떻게 싸웠고, 군더리 방죽에서는 양달사 의병장이 패한 척 왜구를 유인하였다가, 다시 돌아와 섬멸하였다는 기록을 후손들에게 알려주어야 한다.

 

④ 남문 및 좌우 성벽 복원

달맞이공원 보도교 및 남문과 주변 성곽 복원 사진 예시안

 

필자가 남문복원을 고집하는 이유는 좌우로 성곽이 가장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 시굴조사를 한 경찰서 뒤편의 길이가 260여 미터에 무등아파트 뒤편 교동리 387번지 일대는 최대 230미터에 달한다. 두 성곽 사이에 남문을 설치하여 보도교로 연결하면 적어도 500미터가 넘는 읍성길이 조성된다. 현재 군에서 추진하는 달맞이공원 사업을 완료하여 열무정과 경찰서 뒤편을 연결하고, 제2단계 공사로서 남문을 건립한 후 무등아파트 뒤편의 성벽과 경찰서 뒤편의 성벽을 연결한다면 실제로 성곽 위를 걸어보는 읍성길 체험을 할 수 있다. 보도교 위를 걸으면서 영암읍 시가지와 월출산의 보름달을 구경할 수 있다면 좋은 관광자원이 될 거라고 생각한다.

현재 영암정수장 주변과 영암읍교회 입구, 영암성당 입구, 그리고 영암 의회 건물 옆이나 주변의 건물들 틈에는 무수히 많은 읍성 성돌들이 박혀 있다. 필자가 10여 년 전에 공공자치연구원의 세미나에서 대구 동구청의 성돌모으기 운동에 관해 들은 적이 있다. 대구읍성을 대구의 랜드마크로 삼기 위해 성돌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펼쳐서 구 도심을 활성화시켰다는 말에 큰 감동을 받았다. 현재 청주시와 순천시, 포항시 흥해읍에서도 읍성 복원을 위해 성돌 모으기 운동을 추진하고 있다.

우리 영암군이라고 해서 못할 게 없다. 우리 군에서도 성돌 모으기 운동을 대대적으로 추진해서 남문을 중심으로 성곽을 연결하여 관광자원으로 활용하자. 2001년에 약간 복원을 하였던 무등아파트 뒤편 각자성석(刻字城石)은 불에 그을린 채로 영암군의 읍성 보존 정책에 한숨을 내쉬고 있다.

상주시가 올해부터 3년간 상주읍성 복원에 120억여 원을 투자하고 충남 태안군도 50억여 원을 들여 읍성 복원에 나섰다. 나주는 4대 문을 이미 2018년에 복원했고, 강진 병영성과 진도 금갑진성 복원사업도 한창 진행 중이다. 영암읍에 문화재가 없다고 하는 분들을 간혹 있는데, 모두 영암읍의 역사를 몰라서 하는 말씀이다. 영암군의 자랑스러운 문화재는 거의 대부분 영암읍 중심지에 있었다. 남문 성루에는 영암성 모형도도 비치해서 관광객들에게 영암성 대첩을 알리고, 복원된 영암남문과 성곽을 영암의 랜드마크로 삼아야 한다.

 

⑤ 영암성 대첩길 조성


(위쪽 사진은 1915년 지적도상의 성곽, 아래쪽 사진은 필자가 현재의 위성사진에 그린 성곽)


전남문화재연구원에서 1915년 지적도를 따라 그려놓은 성곽 그림을 보면, 영암성의 윤곽이 명확히 드러난다. 그 선형을 따라서 영암성길을 조성했으면 한다. 원광어린이집 담벼락을 지나서 KT 앞을 지나 곧바로 영암도서관 좌측의 골목길, 그리고 영암정수장을 지나 영암성당 뒤편에서 신동아빌라와 영신아파트 사이로 내려오면 곧바로 영암공원의 현충탑으로 이어진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고 영암군청과 영암군의회 사잇길로 내려와 영암군 주차장과 영암농협 주차장을 지나서 동성건재 옆길을 내려오면, 바로 동성건재 터가 동문 터이다. 특히 동문이 있던 그 자리는 동문 고개라 불리던 야산의 중턱이었다. 그 위에 높다랗게 서 있던 영암 동문 문루에서는 저 멀리 덕진포뿐만 아니라 도시포와  주룡포까지 내다볼 수 있었다. 그곳에서 열무정으로 올라가 새로 건축된 보도교를 건너 경찰서 뒤편의 공터로 올라서면 영암성길 탐방이 마무리된다. 영암군이나 국가기관에서 소유하고 있는 공공용지를 중심으로 가능한 곳만이라도 영암성 터를 복원해서 사람들이 탐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길이는 2킬로 남짓. 아침 저녁 산책길로 적당한 길이다. 필자가 2017년에 제안한 달맞이공원 조성사업을 마무리해서 쌍무덤처럼 갈라진 두 개의 성터를 도보교를 연결하고, 남문을 세워서 가장 형태가 많이 남은 성곽들을 하나로 연결했으면 한다.

아울러. 대첩길도 하나 조성하기를 제안한다. 을묘왜변 당시 가장 치열한 전적지였던 현 군청앞을 출발하여 영암장터길, 영암여중고 입구, 공설운동장, 궁도장 앞을 지나서 역리 로터리, 제일교회 앞을 지나오는 대첩길을 만들었으면 한다.

또한 관광객들의 편의를 위해 영암성길과 대첩길 주변에 조선시대 건물들의 표지판을 설치하고, 이 모든 것을 디지털화 해서 스마트폰 앱을 통해 누구나 영암성 대첩길을 즐길 수 있도록 했으면 한다.

그리고 영암성길과 대첩길 주변 가게들은 영암 먹거리며 관광상품들을 판매하게 하고, 열무정에는 활쏘기와 죽궁 만들기 체험 교실을 개설해서, 영암읍 시가지가 관광객들로 넘쳐나는 진풍경을 구경하고 싶다. 군데군데 멋진 화단과 수석공원 등의 볼거리도 만들어서, 영암 시내를 전국의 관광 명소로 만들었으면 한다.

 

2. 영암성 대첩 기념 조례 제정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의 법적인 근거를 확보해야 한다. 이미 지난해 영암군에 조례안을 전달한 바 있고, 언론에도 몇 번 기고한 바 있다.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영암군 영암성 대첩 기념 조례 제정조례안

제1조(목적) 이 조례는 을묘왜변 당시 탁월한 전술과 단합된 힘으로 6천여 왜구를 물리친 영암성 대첩을 널리 알리고 영암군민의 기개와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의 충효 정신을 계승 발전시켜 국가와 지역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으로 한다.

제2조(정의) 이 조례에서 사용하는 용어의 뜻은 다음과 같다.

① “을묘왜변”이란 1555년 5월 11일 6천여 왜구가 침입한 역사적 사건을 말한다.

② “영암성 대첩”이란 1555년 5월 25일 영암성 안팎에서 영암군민들이 왜구를 물리친 사건을 말한다.

③ “조선 최초 의병장”이란 을묘왜변 당시 영암군민들이 의병장으로 추대한 양달사(梁達泗) 장군을 말한다.

제3조(주요 사업) 영암군수(이하 “군수”라 한다)는 영암성 대첩과 관련하여 다음 각 호의 사업을 추진하도록 노력한다.

1. 영암성 복원 사업

2. 각종 기념(문화, 체육, 공연 포함) 행사

2. 조선 최초 의병장 양달사를 비롯한 영암군 의병 현창 사업

3. 영암의 역사문화 창달 사업

제4조(기념일) 영암군민들이 힘을 모아 왜구를 물리친 승리를 기념하기 위하여 매년 5월 25일을 영암성 대첩 기념일로 한다. 다만, 5월 25일이 휴일인 경우에는 일정을 조정하여 기념행사를 개최할 수 있다.

제5조(지원) ① 군수는 제3조의 사업을 추진하기 위하여 관련 단체나 개인에게 행·재정적 지원을 할 수 있다.

② 제1항에 따라 관련 단체나 법인, 개인 등에게 사업을 위탁하거나 행·재정적 지원을 할 경우에는 「영암군 지방 보조금 관리 조례」를 준용한다.

제6조(시행규칙) 이 조례의 시행에 필요한 사항은 규칙으로 정한다.

부칙

이 조례는 공포한 날부터 시행한다.


필자는 조례 제정을 이미 수년 전부터 제안했고, 금년 들어 영암군민신문에는 수차에 걸쳐 글을 써왔다. 민선 8기에는 이런 사업이 조속히 시행되기를 바란다.


(상 해미성 축제, 하 홍의장군 대축제)

 

3. 영암성 대첩 대제전 개최

조례 제정이 필요한 이유는 바로 영암성대첩 기념 사업을 하기 위함이다. 그 중 첫 번째 사업은 바로 기념식 개최다.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 백성들은 신출귀몰한 전략으로 6천여 왜구를 물리쳤지만, 도원수가 의병이라는 이유로 조정에 보고하지 않아 역사에 묻혀 버렸다. 당시에는 이준경, 이윤경의 서슬이 무서웠다고 할 수 있겠지만, 이제는 지방

자치 시대이다. 영암군에서 나서서 기념식을 대대적으로 개최하고, 양달사 의병장의 공적을 널리 알렸으면 한다.

을묘왜변 당시 변협 해남현감은 왜구를 방어한 것을 기념으로 소나무를 한 그루 심었는데, 해남군에서는 지금 그 나무를 ‘해남 수성송’이라고 부르면서 여러 가지 기념사업을 하고 있다. 우리 영암군도 매년 5월 25일에는 기념식을 개최하고, 세미나 개최와 각종 예술공연, 궁도대회를 비롯해 각종 체육대회와 글짓기 대회 등을 열어야 한다.

지난해 5월, 제1회 양달사의병장 궁도대회를 개최한 바 있다. 코로나 19 확산방지를 위해 어쩔 수 없이 관내 궁도인들만 모여서 대회를 개최했지만, 2022년 4월 23일에는 전남 도내 9개 시군의 궁도인들이 모여 기량을 펼치고 화합을 다졌다.

하지만 국민체육진흥법 제18조에 따라 영암군체육회 등에 군비를 보조하는 과정에서 영암군체육회에서는 모든 단체에게 일률적으로 25%의 부담금을 요구하고 있다. 물론 일반 체육단체에 대한 이러한 요구는 필요한 조치라고 본다.

하지만 양달사 장군 궁도대회는 체육단체의 육성이나 궁술 역량 경기라기보다 양달사 의병장의 영암성 대첩을 널리 알리려는 취지에서 시작되었다. 따라서 이 궁도대회에서의 보조금에 대해서는 “영암성 대첩 기념사업 지원 조례”에 의거 부담금을 제외해 주었으면 하며, 영암성 대첩 기념조례를 제정하려는 취지도 바로 여기에 있다.

각종 문화행사나 공연도 마찬가지다. 양달사 관련 행사를 하는 것은 영암군을 알리고, 영암성 대첩의 위상을 높이고, 종국에는 영암군의 역사와 문화적 가치를 선양하는 사업이다. 동화 발간이나 뮤지컬 공연 등도 영암을 영암답게 하는 사업으로서, 군에서 발벗고 나서야 한다.


4. 양달사 현창사업

① 양달사 시묘공원 조성사업

시묘공원 옆에 양달사 형제의 사당을 세우고, 공원 안에 여막이며 쉼터를 만들어야 한다. 현재 전국적으로 많은 현창사업이 추진되고 있고, 우리 군에도 낭산 김준연이나 왕인박사 사당이 있다.

하지만 영암군 역사상 영암군민에 의해 군수로 추대되어서, 군민을 위해 피를 흘린 양달사 의병장의 사당이나 추모관은 없다.

추모관은커녕 지금까지 양달사 의병장의 묘소도 방치해 두다시피 했다.

이제라도 영암군에서 나서서 시묘공원을 번듯하게 정비하고, 그 옆에 사당이며 공적비를 건립해서 양달사 시묘공원을 학생들의 충효 교육장으로 활용했으면 한다. 영암군민과 함께 영암성을 지키고, 왜구를 물리친 이야기를 스토리텔링하거나 창작극으로 제작하여 홍보하게 되면, 시묘공원도 좋은 관광자원이 될 수 있다.

② 장독샘 주변 정비

장독샘은 을묘왜변 때 양달사 의병장이 성안의 군민과 병사들을 위해 파게 한 샘이다. 당시 왜구의 침입에 떨고 있던 성안 백성들은 한 발짝도 밖에 나가지 못한 채 기갈에 허덕이고 있었다.

1555년 5월 24일 오전, 전부부윤 이윤경, 우도방어사 김경석 등과 왜구를 물리칠 전략을 협의하려 성안에 잠입한 양달사 의병장이 한 곳을 가리키며 파보라고 했더니 물이 솟구쳤다. 그곳이 바로 현재의 장독샘으로, 1971년 영암군의 인물사를 들여다보던 김기회 영암군수는 양달사를 영암군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인물로 평가하고, 장독샘 앞에 손수 공적비를 세웠다. 그 후로 양복완 부군수가 일부 정비하긴 했지만, 군에서는 그 동안 방치되어 있었다. 지난해 도비 사업으로 담장이며 우물 등을 일부 정비하고, 쉼터의 명칭도 오거리 쉼터에서 ‘양달사 쉼터’로 바꾸었지만, 아직도 미흡하다. 뒷편의 슬레이트 건물만이라도 사서, 그 부근에 음수대를 설치하고, 옆에는 관광객들이 발을 담그고 담소를 즐길 수 있는 도랑이라도 만들어서 주민들의 명소로 가꾸었으면 한다.

③ 선양사업

영암읍 중앙로는 양달사 의병장이 말을 타고 활을 쏘면서 왜구를 물리치던 곳이다. 영암읍 중앙로를 양달사로로 바꾸고, 현재 기본 설계가 마무리된 달맞이공원은 영암성 대첩 기념공원으로 바꾸었으면 한다.

그래서 언젠가는 초중고생들의 역사 교과서에서 양달사 의병장과 영암성 대첩이 을묘왜변의 핵심 내용으로 자리잡도록 해야 한다.

 

 

Ⅲ. 결론

1536년 6월의 어느 날, 양달사의 어머니가 월출산에 올랐더니, 한 백발 노인이 홀연이 나타나 비검을 준 후 사라졌다. 양달사 의병장의 태몽으로, 이듬해 2월 2일 양달사 의병장이 태어났다. 그래서 양달사 의병장의 호는 남암(南巖, 남쪽의 바위산 즉 월출산)이다. 다시 말해서 남암과 월출산과 영암성은 하나다.

필자는 지난 4월 19일 영암군민신문에 “영암군수 후보님들께”라는 기고문을 냈다. 영암성 대첩을 군정주요업무이자 공약사업으로 넣어달라는 제안이었고, 군민신문에서는 2주 후 2면에 걸쳐 필자의 인터뷰 기사를 실은 후 다시한번 사설로 다루었다.

하지만 현재까지 이 사업을 공약사업으로 하겠다는 후보는 없다. 일부 후보께서, 영암성복원이나 양달사 의병장 현창사업을 적극 돕겠다는 연락이 왔을 뿐이다.

하지만 오늘 이 자리에서 제안한 사업은 반드시 영암군청 소재지 활력화를 위해서 반드시 추진해야 할 사업들이다.

많은 군심들의 참여와 성원을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