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적 자료 및 유적
1. 조선왕조실록(명종실록) 1555년 12월 2일
당시에 어떤 사람이 전라도 장흥부(長興府)의 원벽(院壁)에 시를 써 붙였는데,
시는 다음과 같다.
【한공(韓公)은 한온(韓蘊)을 지칭한 것이고, 광목(光牧)은 이희손(李希孫)이다. 수사(水使)는 김빈(金贇)이며, 원수(元帥)는 이준경(李浚慶)이고, 절도사(節度使)는 조안국(趙安國)이며, 감사(監司)는 김주(金澍)이고, 방어사(防禦使)는 남치근(南致勤)이며, 이윤(李尹)은 전주 부윤(全州府尹)인 이윤경(李潤慶)이다. 변협(邊協)은 해남(海南)을 보전했기에 장흥부사(長興府使)에 초수(超授)되었으나 그의 공이 아니었으며, 양달사(梁達泗)는 영암을 지킨 공이 있는데 발탁하여 기용하지 않았으며, 유충정(柳忠貞)은 본래 사람들에게 버림당하였기 때문에 그 평이 이와 같은 것이다.】
2. 송천 양응정(松川 梁應鼎)의 편지
양달사 장군이 의병을 일으켰다는 근거 자료 중 하나가 바로 송천유집에 있는 양응정이 양달사의 형 달수에게 보낸 답장 편지다. 양응정은 양달사보다 나이가 한 살 연하이나, 1956년 중시문과에 장원을 한 인물로 조선 중기 8대 문장가이자 임진왜란 의병장들을 길러낸 사람이다. 1555년 을묘왜변시 10촌 형 양달수는 동생 달수가 의병장이 되어 출전하려 하자 불안한 마음에 당시 전라도사로 있던 양응정에게 편지를 보냈다. “상중출전(喪中出戰)은 비례(非禮)”라고 하는 주위의 말에 어떻게 하면 좋겠는가를 묻자 양응정은 양달사의 말처럼 “충효가 동일”하니 출전하는게 좋겠다는 답장을 보낸다. 송천유집(松川遺集)에 남아 있는 답장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從兄參奉達洙書 乙酉
海寇之變一至此哉靈海爲直衝要害之地而昇平日久民不知兵倉卒間罔知所措以若伯仲季之賢辦得一死之義則凡有血氣者亦爲之先後豈勝欽歎朝廷之遣將討平恬嬉持久則虜酋之
肆行恐難防禦豈以衰麻在身經權於其間哉起復之義想已講磨於平昔而忠孝一致夫孰曰不可愚見如此幸須不留晷刻一振義旅以慰士林之望云云(松川遺集 권4, 答從兄參奉達洙- 書, 82)
(번역) 왜구의 변이 이렇게까지 되다니요. 영암의 바다는 요충지인데 침해를 입다니요. 승평(昇平)이 오래되다 보니 백성들이 병창을 익히지 못하였고 창졸간이라 조치할 바도 몰라서일 것입니다. 만일 형님 같은 현명하신 분들이 한번 죽기를 각오하고 앞장서신다면 혈기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따라나설 것입니다. 그리되면 얼마나 흠탄할 일입니까? 조정에서 장수를 파견하여 평정한다고 해도 시일이 오래 걸릴 것인즉 그리되면 오랑캐의 만행을 막아내기 어렵습니다. 이 상황에서 어찌 상중임을 따질 것입니까. 상중에 의를 생각하는 것은 익히 강마하셨을 터, 충효가 하나이니 상중임을 걱정 말고 지체없이 사림들의 뜻에 따라 의병을 일으켜 주십시오.
3. 전주부윤 이윤경 문집
을묘왜변 당시 영암으로 내려와 임시로 영암군수 역할을 함. 당시 편지 내용으로 보아 양달사가 현장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의병이 있었다는 것을 확인할 수가 있다.
1) 숭덕제유고 3권 중에 남긴 47편의 편지 중 동생 이준경(자, 원길)에게 보낸 10번째 편지
<전략> 歸專功於我。而使防禦使無可觀之功。非徒失實。且駭人聽。其中爲先唱義之說。尤非所當。安有如此未安之事乎。( 나에게 모든 공을 돌리고 방어사에게 볼 만한 공이 없다는 것은 사실과 맞지 않다. 또 놀라운 일은 그 안(장계)에 먼저 창의가 있었다는 말인데, 전혀 옳지가 않다. 어찌 이처럼 온당치 못한 일이 있었겠는가? )
당시 감사가 조정에 보내려고 한 장계의 초안을 미리 김첨추가 그에게 보여준 것 같은데, 그는 급히 나주로 달려가 감사에게 다시 자세히 영암일을 설명했다고 쓰고 있다. 당시 영암에 창의가 정말로 없었다면 어떻게 감사가 알았을 것이며, 이윤경이 왜 그토록 크게 놀랐겠는가?
2) 숭덕재선생유고권지3/편지 중 30번째/ 원길(동생이자 도순찰사인 이준경)에게 주다 /崇德齋先生遺稿卷之三 / 書
<전략> 且靈巖之戰。初欲出門試驗者趙逑金希章。馳射擊刺者雖多而最能射殺者趙逑金希章梁達泗 三人爲最耳。(영암의 전쟁을 말하자면, 조구, 김희장을 중심으로 출문시험을 했는데 활을 쏘며 맞춘 자가 비록 많았으나, 가장 사살을 많이 자는 조구, 김희장, 양달사 3인이이었다.)
4. 여지도서(輿地圖書)
여지도서는 1757년부터 1765년 영조 때 각 군현에서 편찬한 것으로, 호남절의록보다 50여년 앞서고, 호남읍지와는 150여년 전에 편찬된 자료로, 내용은 호남절의록의 내용과 유사하나, 창우대를 화랑으로 표현한 점이 다르다.
梁達泗爲人慷慨膂力過人登武科以縣監丁憂還鄕嘉靖乙卯倭寇大至列邑奔潰賊兵猖撅達泗痛河北之無義士自念服麻從戎雖非孝禮不可以賊遺君遂召募丁壯指授方略又聚花郞盛服綵繡俱張百戱賊見而喜之皆往觀之建泗覘其無備率衆奮擊花郞輩亦翼而擊之城中亦皷噪從之五六萬賊徒屠戮殆盡倭徒不勝忿怒并力追之達泗佯敗而走誘引於無水淤泥處倭果追之盡陷於泥中達泗盡斬之南方以寧達泗以喪人恥詣元帥獻功復歸廬次而終至今嗟惜(한국사데이터베이스<db.history.go.k>, 輿地圖書下 靈巖. 검색일자 2019. 2. 7.)
(번역) 양달사는 강개하고 힘이 남들보다 뛰어나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이 되었다.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고향에 있으니 1555년 을묘년에 왜구가 침입하여 읍들이 분궤되고 왜구들이 미쳐날뛰었다. 달사는 안록산의 난 때 당현종이 '하북(河北)에 의로운 인사가 없다'고 하였듯이 전라도에 의로운 인사가 없음을 애통해 하고 스스로 상복을 입고 군사를 일으키기로 했다. 비록 효례가 아니라 하더라도 적을 내쫓으려면 어쩔 수 없었기에 마침내 장정을 소집하여 싸움의 방법과 책략을 가르치고 또 화랑의 옷에 채수를 하여 온갖 희극을 벌이게 하였다. 적들이 보고 즐기며 무방비 상태가 되자 달사는 의병을 이끌고 맹공을 했다. 화랑배와 함께, 성중에서도 공격을 하고, 또 북을 치며 고조를 시키니 5, 6만 적도가 살육되고 위기가 진압되었다. 왜구들이 이길 수 없자 화를 내며 쫓아오니 달사는 패한 척 물이 없는 진흙 구덩이로 유인하였고, 왜구들이 과연 그것에 이르러 진흙구덩이에 빠지니 달사가 진참하여 남방이 평안해졌다. 달사는 상중의 몸임을 부끄러워하며 원수에게 모든 공을 돌리고 묘막에 복귀하여 시묘를 마치니, 지금에 이르러 보니 아깝기 그지없다.
5.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호남절의록은 동래부사 재임시 파직되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7대손인 고정헌(高廷憲, 1735~?)이 1799년 간행한 것으로, 호남절의록 중 을묘의적의 난에 양달사 의병장의 전적이 기록돼 있다.
(번역) 양달사(梁達泗): 자(字)는 도원(道源). 본관은 탐라(耽羅). 감역(監役) 흥효(興孝)의 증손이며 사복주부(何僕主簿) 승조(承祖)의 아들이다. 중종 31년(1536)에 무과에 급제하였고 중종 39년(1544)에 중시(重試)에 합격하였다. 집에 있을 때는 효제(孝悌)하였고, 관직에 있을 때는 청간(淸簡)으로 임하였다. 명종 10년(1555)에 해남(海南)현감이었는데 어머니 상을 당해 집에 돌아왔다. 그때 왜구들이 노략질하러 쳐들어와 병마사인 원적(元績)과 장흥(長興)현감 한온(韓蘊)이 전사하였고, 영암(靈巖)군수 이덕견(李德堅)은 항복하였다. 원수(元帥) 이준경(李浚慶)과 방어사 남치근(南致勤)이 적의 예봉을 막지 못하고 있었는데 공이 이에 분개하여 눈물을 흘리며 “임금과 부모는 한 몸인데 어찌 예제(禮制)에 얽히어 소홀하게 할 것인가.”하고 상복을 입은 채로 빈 성에 들어가니 평소 공의 뛰어난 지략에 감복하던 백성들이 다투어 군에 응모해 왔다. 적병이 고을의 북쪽에 둔치고 있었는데 공이 적들이 보는 앞에서 광대무리를 시켜 알록달록한 옷을 입고 꽃 모자를 쓰고 온갖 유희를 벌이게 하니 적들이 이를 보고 웃고 떠들었다. <이 틈을 타> 공이 용맹한 군사 수백을 이끌고 몰래 역현(驛峴)을 돌아 일제히 뛰쳐나가니 광대 무리들이 함께 공격하였고, 성중의 노소(老少)들이 또한 북을 치며 뒤따랐다. 이로써 대승을 거두니 죽인 자의 수효를 이루 다 셀 수 없었고, 공도 10여 군데의 부상을 입었다. 병사를 모아 잠시 쉬도록 하였는데 왜적들이 다시 병을 모아 추격해오니 한편 싸우며 한편 퇴각하던 중 말의 발이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공은 손으로 말의 갈기와 꼬리를 잡아 끌어내어 다시 오르려는데 왜장이 칼을 던지매 공은 이를 피하였으나 그만 말이 이에 맞고 거꾸러지고 말았다. 공이 급히 성에 들어가 만호(萬戶) 박천추(朴天樞)의 말을 빌려 타고 적을 유인하니 적이 쫓아왔다. 공이 거짓으로 패한 척 하고 도망치다 금교(金橋)의 진흙밭에 이르러 말을 옆구리에 끼고 번개처럼 이를 지나니 적들은 뒤쫓아오다가 과연 진흙 구덩이에 빠지고 말았다. 이에 공은 말을 돌려 일검으로 모두 진살(盡殺)하였다. 이어 원수의 군사들이 이르러 함께 적들을 섬멸하였다. 사태가 평정된 후 공은 집으로 돌아가 예제를 지키기를 처음처럼 하였다 사람들의 말이 혹 “적을 섬멸한 일.”에 미치면 공은 “기복(起復)하여 싸움터에 나선 것은 임금의 명에 따른 것이 아닌데 이에 상을 바란다면 이는 내가 부끄러워 할 일이다”고 하였다. 얼마 후 병으로 갑작스럽게 죽으니 고을 사람들이 울면서 말하길 “우리 고을이 오늘을 의지할 수 있게 된 것은 모두 양공의 공이다.”라고 하였다. 참판(叅判) 이기경(李基敬)이 전(傳)을 지었고 유선(諭善) 윤득부(尹得孚)가 묘지명(墓誌銘)을 지었으며 목사 임육(任焴)이 행장을 지었다.(호남절의록 권5 하 부록, 을묘년의 사실(乙卯義蹟) 165-167)
6. 호남읍지
1895년(고종 32)년 전라도 각 군현에서 작성한 읍지와 사례를 합편한 전라도의 도지(道誌)에서 발췌한 것이다.
梁達泗 義士梁達泗濟州人武科縣監膂力過人丁憂在家値乙卯倭寇猖獗列邑奔潰本郡 被圍城幾䧟達泗不勝忠憤墨衰募士又聚倡優衣綵張百戲賊聚觀達泗乘賊怠舊擊大破賊忿 怒幷力
追之達泗賊淤泥中挾馬跳去賊盡陷況中因盡斬之賊遂平達泗恥以喪人獻功元帥還 歸廬次終身不伐以此未蒙褒典道內儒生累呈營門
(번역) 의사(義士) 양달사(梁達泗). 제주인이니 무과에 급제하여 현감을 지냈으며 앞날이 창창하였다. 아버지 상을 당하여 집에 있는 중 을묘년에 왜병이 침입하여 차례로 읍성을 점령하고 본군 읍성을 포위 성을 함락하니 달사가 분노하여 상(喪) 중임에도 의병을 모으고 또한 광대를 모아 적을 희롱하게 하여 적의 눈길을 돌린 다음 달사는 적이 태만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대파하였다. 이에 적이 분노하여 병사를 규합하여 추격하므로 달사가 왜병을 유인 진흙고랑으로 몰아 적이 질탕한 진흙 속에서 허우적대므로 적을 섬멸 평정하였으나 달사는 상주(喪主)의 몸으로 부끄럽게 여기고 그 공을 원수부로 돌리고 집으로 돌아와 종신토록 살았으나 지금까지도 포상을 받지 못하였다. 도내 유생들이 수차례 관청에 표창을 상신하였다.
호남절의록은 동래부사 재임시 파직되어 임진왜란 때 의병장으로 활약한 고경명(高敬命, 1533~1592)의 7대손인 고정헌(高廷憲, 1735~?)이 1799년 간행한 것으로, 호남절의록 중 을묘의적의 난에 양달사 의병장의 전적이 기록돼 있다.(영암문화원, 2009, 호남읍지발췌 영암읍지, 117-118)
7. 남암공(양달사) 문헌
이것은 2022년 3월 16일 광남일보에 보도된 기사다. 신문에 보도된 남암공 문헌(제주양씨주부공파종중 양금호 전 회장 소유)에는 1555년 5월 25일 영암성대첩 이후, 양달사 의병장에게 포상이 없음을 한탄하면서, 속히 은전을 내려달라는 청원들이 담겨 있다. 1555년 12월 2일, 조선왕조실록에 기록된 '공이 있는 달사는 어디로 갔나(有功達泗歸何處)의 한탄어린 시구가 무려 300여 년 동안 이어져 왔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는 문집이다. 더욱이 이 안에는 나주목사인 임육을 비롯해 기학경, 윤득부 등 당시 조선에서 명망이 높았던 선비들뿐만 아니라, 1777년에는 전라도 유생 444명의 탄원서가 담겨 있다.
8. 전주향교 통문과 좌승지 추증 승정원 일기
호남읍지와 남암공 문헌집에도 기록돼 있듯이 도내 유생들이 수차례 관청에 표창을 상신하였고, 필자가 발견한 전주향교 통문(通文)도 당시의 그런 안타까운 현실을 짐작케 한다.
0 관리자 : 도포면 봉호리 봉호정 마을 양진근
0 재질 : 한지
0 규격 : 가로 54㎝×78㎝
0 시기 : 1842년(임인년)
0 원문
右文爲通諭事大凡忠孝之卓異者從古何限 而忠而不伐孝而能全者幾何人哉 有一於此靈巖郡梁參奉諱達洙梁海南諱達泗兄弟卽其人也 當乙卯倭寇之猖獗也 沿邊守宰莫不逃而或有扙節守死或有委城全軀 沿海諸鎭連置屠陷則是豈非壬亂兆眹乎于斯時也公之兄弟丁憂居墓而憤不顧身舍經從權墨衰倡義出奇拔謀摧破勁敵使此八域之生靈幸免屠殲則是誰爲伊公之賜 若夫朝家之命將出師勘定禍亂則亦已後矣 惟彼梁公兄弟克平禍亂不伐其功廬墓如初終始一節則是豈庸庸務伐之人哉 而況混戰之際身被重創因以長徃則於國於家忠孝盡矣于今二百餘年之間公議沸騰士論抑鬱玆以發通惟願僉君子齊聲仰籲於營邑以爲騰時褒揚之地千萬幸甚右敬通于靈巖鄕校
壬寅 五月 二十四日
全州鄕校 發文掌議 朴應壽
幼學 金奎成 朴挺壽 吳昌一 李世聃 李遠九 李重栻 吳鍾裕 崔永一 李光兼 朴璟焌 林泰燁
李重曦 朴喜仁 幼學 柳錫夏 李洛龜
(번역)
이것은 알리는 글입니다. 무릇 충효가 남다르게 뛰어난 사람이 옛날부터 어찌 한정이 있으리요만 충성을 다하고도 자랑하지 않고 효(孝)를 다하고도 온전히 한 자가 몇 명이나 되겠는가. 이곳에 그러한 분이 있으니, 영암군의 참봉 양달수(梁達洙)와 해남현감 양달사(梁達泗) 형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을묘년에 왜구가 창궐했을 때, 연변의 수령들이 도망가 숨어버려, 혹 절월(節鉞)을 죽음으로 지킨 사람도 있고, 혹은 성을 버리고 제 몸만을 보전한 사람도 있었지만 연해의 진영들이 잇달아 도륙당하고 함락되도록 버려두었으니, 바로 이것이 어찌 임진왜란 조짐이 아니겠습니까? 이때 공의 형제는 상을 당하여 여묘살이를 하고 있었으나, 분개하여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바로 권도(權道)에 따라 상복을 입은 채 창의(倡義)하였고, 기발한 계책을 내어 적을 격파하여 팔도 백성들이 도륙을 면하게 하였으니 이 일을 누가 하였습니까? 공의 은덕입니다.(중략) 더구나 혼전 중에 중상을 입고 그대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으니, 나라에서나 가정에서나 충과 효를 다한 것입니다. 2백여 년이 흘러 공의(公議)가 들끓고 사론이 억울하게 여겨, 이에 통문을 보내니 여러 군자들께서는 한목소리로 고을에 호소하여 즉시 포상을 받도록 해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이 글을 삼가 영암향교에 통보합니다. 임인년(1842년) 5월 20일
발문인은 전주향교 장의(掌議)인 박응수이며, 그 덕분인지 5년 후인 헌종 13년(1847년) 10월 19일, 양달사는 통정대부 좌승지로, 형 양달수는 사헌부 지평으로 추증된다.
故縣監楊達泗贈左承旨, 故參奉楊達洙贈持平, 已上忠節卓異, 贈職事, 承傳。(하단 사진 우측)
(고 현감 양달사는 좌승지에 추증하고, 고 참봉 양달수는 지평에 추증하라. 윗대에 충절이 뛰어나고 남달랐다. 관계관은 그렇게 임금의 뜻을 전하라.)
결국 헌종 때부터는 조정에서도 양달수․양달사의 공적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우측의 기록물은 헌종 13년(1847년, 도광 27년) 10월 19일 기록이다.
"故縣監楊達泗贈左承旨, 故參奉楊達洙贈持平, 已上忠節卓異, 贈職事, 承傳((고 현감 양달사는 좌승지에 추증하고, 고 참봉 양달수는 지평에 추증하라. 일찍이 충절이 뛰어나고 남달랐다. ※ 楊은 梁의 오기임) . 즉 1555년 5월 25일 이후, 만 292년 만에 좌승지로 추증된 것이다. 그것도 1845년에 부임한 이시재 관찰사 덕분이었다. 하지만 너무도 시간이 흘러 영암군에서는 관심이 없었고, 1897년에 발간된 영암군지에는 여전히 아무런 포상이 없다고 기록돼 있다. 영암군에서 얼마나 무관심했든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유적, 유물
1. 장독샘(將纛泉)
○ 위치 : 전라남도 영암군 영암읍 동무리 137-7, 76㎡, 국유지
○ 유래 및 현황
장독샘은 영암군 영암읍 서남리 오거리에 있다. 1960년대부터 국유지로 돼 있으며, 1971년까지 주민들의 식수원이자 빨래터였다. ‘장둑(독)골샘, 장독골 시암, 장독샘, 장군샘, 장군정’등 다양한 이름이 존재한다.
을묘왜변 당시 영암향교가 있었던 영암읍 역리 구(舊) 영암읍 농협 일대나 금교가 있었던 현 공설운동장 입구 등도 중요한 전적지지만, 읍성 내에서 병사들이 기갈에 허덕이고 있을 때 샘을 파서 병사들의 사기를 북돋은 장독샘은 가장 대표적인 전적지임에 틀림없다.
그래서 1971년 영암군에서는 장독샘 정화사업을 벌여 창의장 양공달사 공적비(倡義將梁公達泗 功績碑)를 건립했다. 상수도 개발로 쓸모가 없어진 장독샘의 역사성을 기리고 양달사 장군의 업적을 후손들에게 전하기 위하여 그 자리에 화강석으로 팔각형 비석을 세웠다. 공적비는 장방형 좌대 위에 빗몸을 세우고 한옥지붕형의 비갓을 갖춘 화강석 석비이다.
비석 뒷면에 13행의 비문이 있다. 1971년 3월 영암군수 김기회(金基會, 1970. 3. 31 ~ 1971. 8. 20 재임)가 비문을 지었고, 서예가 구철우(具哲祐, 1905 ~ 1989)가 글씨를 썼다.
○ 현장사진
< 2019년 장독샘>
<2022년 정비된 장독샘>
○ 창의장 양공달사 공적비문
창의장 양공달사 공적비(倡義將梁公達泗功績碑)
공의 휘는 달사요 호는 남암이니 적제주부 승조의 자요 비(妣, 돌아가신 어머니)는 청주한씨이다. 이조 중종 13년 무인에 영암 봉호정에서 출생하였다. 형 달수 제 달해 달초와 더불어 양학포 선생에게 수업하여 등무과하고 중시에 발탁되어 해남현감으로 재임 중 거령 47년 명종 10년 을묘에 내간(內艱, 어머니의 喪)을 당하매 還家 居廬(무덤 가까이 거처함)하던 중 해적 수만이 해남 달량진에 상륙하여 列邑을 함락하고 영암을 공략하므로, 공이 개연왈 “군부일체니 불가좌시라” 하고는 형 및 2제와 함께 장정 4천여명을 규합하여 혹 작(作) 倡優隊하고 혹 유치어니(誘致淤泥) 중의 전술로 적을 격파하며, 공도 數十瘡을 입고, 때마침 하유월이라 서갈(暑渴)이 심하여 사졸의 전의상실함을 본 공이 장독으로 지점한 땅을 팠더니 청수가 용출하여 서로 마시며 용기를 얻어 적을 섬멸하였을 뿐만 아니라 일성중(一城中)의 식수난을 영구히 해결하게 되었거니와 그 후 이 샘을 장독천이라 일컫게 되었다. 난평 후(亂平後)에 상신(喪身)으로 출전하였다 하여 공을 원수에게 돌리고 歸家수제한 후, 익년 戊午에 창독으로 애석히 몰하니 이청강이 “有功梁達泗歸下處오 賞罰不公明道滅”이라는 시를 지어 공의 공적이 도멸(道滅)함을 탄하였다. 그 후 헌종조에 좌승지를 증하고 정려를 명하였다. 여(余)가 부임한 후 향중다사와 문의하고 또 사승(史乘)을 참고하여 이 비를 세워 공적을 추모하는 바이다.
서기 1971년 3월 일 영암군수 경주후인 金基會 撰 능성후인 具哲祐 書
2. 시묘 유허(侍墓遺墟)
○ 위치 : 전라남도 영암군 도포면 봉호리 산 65(임), 약 2,000㎡
○ 현황
양달사 장군 시묘유허(侍墓遺墟)는 영암읍 도포면에서 시종면소재지로 통하는 지방도 연변에 형성된, 봉호정 마을 입구의 제주양씨 세장산(世葬山)에 있다. 나지막한 구릉지다. 묘는 총 12기인데 시묘유허로 지정하였으면 하는 범위는 양달사의 부모(어머니는 두 분임), 그리고 양달사 4형제의 묘 등 총 7기가 위치한 150㎡ 정도다.
맨 위에는 양달사의 증조부 감역(監役) 흥효(興孝) 내외의 쌍분 1기, 그 아래는 조부 필(泌) 내외 쌍분 1기, 그 아래는 주부공파의 파조이자 양달사 장군의 선친인 승조(承祖)의 묘이고, 좌측에는 청주한씨, 우측에는 둘째부인의 진주강씨의 묘가 나란히 있다. 청주한씨 묘역에는 묘비(墓標)가 있는데, 글씨는 마모되어 잘 알아 볼 수 없으나 비갓을 갖추지 않은 석비로서 조선 전기에 세운 것으로 보인다. 양달사 장군 형제가 시묘살이한 묘막(墓幕)이 있던 곳은 청주한씨의 묘소 부근으로 보인다.
양달사 장군 묘비는 장방형의 받침 위에 비몸과 비갓이 있는 석비다. 앞면과 뒷면에 글씨가 새겨 있는데 풍우에 마모되어 잘 판독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앞면 2행 가운데 왼쪽(향좌)의 글씨는 “현감양달사지묘(縣監梁達泗之墓)”라는 음각글씨가 보여 양달사 장군 유적임을 알 수 있다. 묘비와 함께 시묘유적임이 분명하지만 유구 확인은 어려우므로 시묘유허(遺墟)라 명명하였으면 싶다.
이미 1974년 6월 도지사 허련(許鍊)과 길전식 강기천 국회의원, 박철 이환의 신용호 등 영암출신 국가적인 인사들을 고문으로, 영암군수 김연수를 추진위원장으로, 김규섭 등 22명의 각 기관단체장을 추진위원으로 구성하여 양달사 장군 순국비를 범군민적으로 건립하였다. 그리고 1975년 4월에는 김연수 군수가 양달수·양달해·양달초 묘소 앞에도 공적을 기리는 묘비를 세운 바 있어, 그 당시 전라남도 기념물로 지정했어야 한다고 본다. 효율적인 관리를 위해 문중에서 2019년 1월 양달사 4형제의 묘를 영암군 시종면 봉소리 조동마을에서 도포면 봉호리 선산으로 이장하면서 묘비도 함께 이장하였다.
○ 현장 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