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달사와 영암성대첩
양달사의 탄생과 관직 활동
양달사는 1518년 2월 2일, 전라도 영암 도포 봉호정에서 양승조(梁承祖)의 4남 2녀 중 2남으로 출생했다. 어려서부터 힘과 담력이 남달랐던 그는 말타기와 활쏘기 등 운동 능력도 탁월했다. 형 달수와 더불어 화순에 사는 기묘명현이자 삼종숙인 학포 양팽손(梁彭孫)으로부터 학문을 배웠다. 하지만 왜구의 침입이 잦고 주민들의 피해가 막심하자 무과에 뜻을 두고 열심히 병법과 무예를 연마하여 19세인 1537년(중종 32년) 9월 10일 모화관에서 열린 전시에서 28인 중 병과로 무과에 급제하였고, 훈련원습독관(지금의 사관학교 교관)으로 재임하던 명종 1년(1546년) 11월 10일에는 10년에 한 번씩 당하관(정 3품 이하 문무관)들을 대상으로 치러지는 일종의 승진시험인 중시(重試)에서 합격자 35명 중 5위의 성적을 거둬 진해·해남현감 등을 지냈다. 공직에 있어서는 항상 청렴하고 근검하였으며, 집에서는 형제들과 우애가 좋았다.
중시 합격 무과방목(중앙대학교 소장)
시험일 1546년 10월 11일 / 합격자발표일 1546년 10월 17일 / 양달사는 35명 중 5위였음
영암성 대첩
1553년 2월 4일, 어머니(淸州韓氏)가 돌아가시자, 시묘살이를 위해 해남현감을 그만두고 고향 봉호정에 머물던 중 1555년 5월 11일 왜구가 침입했다. 5월 13일 달량진(현 해남군 북일면 남창) 전투에서 절도사 원적(元績)과 장흥부사 한온(韓蘊)이 죽고, 영암군수 이덕견(李德堅)이 항복하였다. 인근의 성들도 잇달아 함락되면서 서남해안은 왜구들의 살인과 약탈과 방화로 끔찍한 전쟁터로 변했다.
사태의 심각성을 직감한 관찰사 김주는 전주부윤(현 전주시장) 이윤경(李潤慶)에게 빨리 가서 영암을 지키라고 하였고, 조정에서도 6월 16일 호조판서 이준경(李浚慶, 전주부윤 이윤경의 친동생)을 도순찰사로, 김경석(金景錫)을 우도방어사로, 남치근(南致勤)을 좌도 방어사로 내려보냈다. 하지만 이준경은 나주성에 머물렀고, 김경석과 남치근도 왜구의 기세에 겁을 먹고 성안에 들어앉은 채 성벽을 보수하기에만 급급했다. 이윤경마저 성을 지키기에만 몰두할 뿐 성밖에는 신경을 쓰지 못했다.
어쩔 수 없이 성밖의 영암백성들과 인근 군현에서 도망온 피난민들은 자구책으로 시묘살이를 하고 있던 전 해남현감 양달사를 좌수(혹은 의병장)로 추대하였고, 양달사는 곳곳에 격문을 보낸 후 각지에서 달려온 장정들을 모아 훈련을 시키면서 왜구가 다가오기를 기다렸다.
드디어 5월 24일 새벽 왜구가 전격적으로 영암성을 포위하고 동문 밖에 있던 향교에 진을 친 후 백성들을 도륙하기 시작했다. 그날 밤 양달사 장군은 야음을 틈타서 은밀히 영암으로 이동했다. 향교 뒷산(현 망호리 뒷산)에 은둔한 채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1555년 5월 25일 오전, 미리 분장시킨 창우대(倡優隊, 남사당패)로 하여금 향교 앞에서 굿판을 벌이게 하여 왜구들을 방심시킨 후, 왜구들이 굿판을 즐기면서 웃고 떠드는 사이에 일시에 급습하여 대승을 거두었다. 격분한 왜구들을 군더리 방죽(현 공설운동장, 당시 모내기철이어서 물이 없었다) 진흙 구덩이로 유인하여 참살하는가 하면, 관군과 함께 잔당을 몰아내는 등 혁혁한 전과를 올렸다.
또한 5월 24일 오전, 관군과 협공 전략을 의논하기 위해 성안에 들어간 양달사는 병사들과 백성들이 기갈에 허덕이는 것을 보고 장독샘(將纛泉)을 파게 하여 사기를 진작시켰으며, 지금도 영암군청 앞에 그 유적이 남아 있다.
당시 김경석의 종사관으로 참전한 양사준(조선의 3대 명필 중 한사람인 양사언의 동생)은 이 날의 승리를 정왜대첩(征倭大捷)이라는 시로 기록하였으며, 1799년 고경명의 후손 고정헌이 편찬한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에도 이 때 양달사 의병장이 거둔 승리를 '섬멸한 적의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의 대첩이었다(大捷屠殲不可勝數)"고 기록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임진왜란 때의 각종 대첩처럼 1555년 5월 25일 영암성에서의 승리를 이 지역의 지명을 넣어 '영암성대첩'이라 부른다.
을묘왜변 후의 양달사
여지도서(輿地圖書, 1757)나 호남절의록(湖南節義錄), 영암군지, 그리고 '제주양씨주부공파세보<1959> 등에 따르면, 의병장 양달사는 왜구를 물리치고 봉호정으로 돌아와 시묘살이를 마친 후 영암성 전투 때 입은 창독으로 1557년 12월 20일 40세의 나이로 여생을 마쳤다고 돼 있다. 하지만, 미암 유희춘의 1671년 10월 7일 일기에, "羅老職士恒·前海南梁達泗及金千鎰士重來訪 余與羅梁對飯 於金亦飮之酒(노직 나사항, 전 해남현감 양달사, 김천일이 내방했다. 나와 나사항, 양달사가 마주앉아 밥을 먹었고, 김천일은 술도 마셨다.)라는 기록이 있어, 돌아가신 해를 1571년 후로 봐야 한다.
당시 양달사의 공적이 조정에 보고되지 않아 조선왕조실록에는 그의 이름밖에 남아 있지 않으나 200여 년 후에 발간된 여지도서와 호남읍지 등에 그의 공적이 자세히 전해져 내려오고 있으며, 유림들의 건의로 1847년(헌종 13년) 10월 19일 좌승지로 추증되었다. 양달사의 묘는 2019년 8월 영암군 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된 도포면 봉호정 제주양씨 선산 한가운데 위치에 있으며, 묘지 앞에는 1974년 영암군수가 세운 순국비가 있다. 2019년 8월 22일 영암군에서는 양달사 형제와 부모의 묘소를 영암군향토문화유산 제8호로 지정 고시했다.